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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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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사단소개
  • 흥사단운동의 역사
  • 흥사단운동의 역사

    민족에 눈을 뜬 청년 도산

    구한말 일본의 조선 진출은 청(중국)은 물론, 같은 야심을 가진 러시아와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고, 급기야는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을 일으켰다. 일본은 두 전쟁에 승리한데 이어 영·일 동맹을 체결하고, 미국과의 비밀 협약을 통하여 한반도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본격적인 식민지화 작업에 착수했다.

    이 무렵 고향인 평양에서 서당 선배 필대은의 영향으로 새로운 사조에 눈뜨기 시작한 16세의 안창호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조국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라에 힘이 없음을 통감하였다.

    도산은 힘의 중요한 요소는 지식, 경제력, 도덕력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정직을 바탕으로 한 신용 즉, 인격의 힘은 모든 일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임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나라가 부강해 지려면 개개인이 부강해야 하며, 국민 개개인이 힘 있는 국민이 되려면 우선 나부터 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흥사단(興士團)의 창단 , 민족의 각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다.

    1912년 미국에 도착한 도산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취임하여 교포들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을 기를 새로운 단체의 조직에 착수했다. 그 취지는 청년학우회와 유사하지만 이름은 ‘흥사단(興士團)’으로 하였다.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홍언(경기도), 염만석(강원도), 조병옥(충청도), 민찬호(황해도), 송종익(경상도), 강영소(평안도), 김종림(함경도), 정원도(전라도) 등의 8도 대표를 포함하여 25명의 창립위원으로 흥사단이 탄생되었다.

    1920년 1월부터 상해의 흥사단 단우회는 흥사단 약법을 인쇄하고, 박선·정인과·김병연 등 미주에서 건너온 단우들과 더불어 흥사단 원동 위원부의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안국형·김여제·박현환·주요한 등의 입단 문답과 입단식을 시작으로 새로운 인재들을 속속 단우로 맞아들였다. 당대의 문장가요 천재적 작가인 이광수와 조국의 독립·부흥과 흥사단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백영엽·이용설·차이석·선우훈 등이 입단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리하여 9월에 정식으로 원동위원부가 설립되었다.
    1924년에는 이른바 갑자논설로 알려진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고, 남경에 동명학원을 세워 미주로 유학할 인재들을 교육하는 한편, 꾸준히 이상촌 건설을 위한 토지를 물색하다가 1931년에는 남경에 부지를 매수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도산이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됨으로써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1921년 귀국한 춘원은 박현환·김태진·김항주 등의 단우들과 더불어 뜻있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이듬해 2월 12일 서울에서 수양동맹회를 창립하였다. 그 목적과 조직·방법 등이 흥사단과 동일하였으나,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수양 동맹이라는 표현을 택했다.

    한편 1923년 1월 16일에는 평양에서 김동원·김성업·김병연·조명식 등 대성학교 동창생들이 모여서 ‘동우구락부’를 조직함으로써 국내에 두개의 흥사단 조직이 탄생된 셈이다. 1925년 12월 두 단체의 대표들이 서로 회합을 거쳐 ‘수양동우회’로 통합하고, 규약은 수양동맹회의 것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다시 ‘동우회’로 이름을 고쳐, 1926년 5월에는 <동광>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흥사단주의를 통한 민족의 각성과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시련속 단우간의 결속과 독입운동

    1937년 6월 7일,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꼭 1개월 전에 한반도에서의 민족주의 세력을 말살하기 위하여 민족지도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약 5백 명이 검거되고, 흥사단우도 도산을 포함하여 약 70명이나 검거되었다. 이어서 8월 6일에는 유치장에 감금된 단우들에게 강제로 동우회 해산서에 날인하게 하여 국내에서의 흥사단 운동은 15년 만에 중단되었다. 도산은 앞서 2년 반의 옥고를 치르고 가출옥하여 평양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하며 이상촌 건설을 구상하던 중, 또 다시 투옥되었다. 그 길로 병을 얻어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다른 단우들은 약 5년에 걸쳐 차례로 석방되었으나, 그동안의 고초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이로 인하여 흥사단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8월 18일에는 예비단우 5명과 통상단우 8명에 대한 제적 및 출단이 단행되었다. 친일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하여 반민족적 해단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탄압과 회유가 더욱 심해지면서 적지 않은 단우가 동요되고 변절을 한 사실은 흥사단으로서도 치욕일 뿐만 아니라 민족사의 비극이다.

    비록 국내에서의 조직은 와해되었으나, 그런 시련 속에서도 많은 단우들이 미주와 원동에서 굳건히 단을 지키며 동맹수련과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있었기에 광복의 그 날을 맞을 수가 있었다.

    비정치단체로서의 흥사단

    1945년 11월 11일 송종익·한시대·김병연 등의 재미 단우와 유진동·김붕준 등의 원동 단우들의 귀국을 환영하는 모임에서 흥사단 운동의 국내 재건을 결의하고, 12월 27일에 국내외 단우 33명이 모여 재건 준비를 위한 첫 회합을 갖고, 국내 위원부 위원 12인을 선출함으로써 국내에서의 흥사단 운동이 재개되었다. 첫 위원장은 김윤경이었고, 이듬해 장리욱이 위원장을 맡아서 본부 이전을 위한 절차를 밟게 되었다.

    이 무렵 한국 사회에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앞두고 정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던 때라, 흥사단의 이런 움직임을 정치 활동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단 내부에서도 흥사단을 정당으로 개편하자는 일부 단우들의 주장이 있었으므로, 1946년 6월 21일에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즉, “흥사단은 결코 정치 단체가 아니며, 따라서 어느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 또는 반대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이 문제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논란이 되어 결국 1947년 개정된 약법 제 6조에 “본단 운동의 항구성에 감하여 본단은 정치활동에 관여치 아니함. 단, 단우 개인의 자격으로 그 소신과 양심에 비추어 행동하는 자유가 있음.” 이라고 명시하였다.

    국내 위원부와 미주 본부와의 긴밀한 연락과 협조 하에 본부 이전을 위한 준비를 하는 한편, 1946년 9월 28일은 해방된 조국에서 최초의 국내 대회가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79명의 단우와 각계각층의 내빈 91명이 참가하여, 선언문·행동 강령· 훈련 요강·<동포에게 격함>이라는 호소문을 채택·발표하였다.

    통산 제 35차 대회가 되는 이 국내 3차 대회를 계기로 국내에서의 단세는 날로 확장되어 가고, 새로 입단하는 단우도 급격히 늘어나고 부산·대전·춘천·수원·인천·연백 등지에 지방 조직도 창설되어 이듬해 4차 대회는 서울의 중부 대회와 부산에서의 남부 대회로 나누어 시행하게 되었다. 기록으로 보더라도 입단자 수가 1948년에 207명, 1949년에 185명으로 1961년까지의 연도별 입단자 통계에 있어서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단우의 증가와 더불어, 1948년 3월에는 청년부가 창립되고, 1949년부터는 반조직이 이루어져서 정기적인 수련 집회인 ‘월례회’와 별도로 다양한 수련활동이 전개 되었다.

    6·25 민족적 비극과 사회적 혼란속에서 다양한 활동과 사업전개

    6·25 동족 상잔의 비극은 우리 민족에게 인명과 재산은 물론 정신적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민족적 대 재앙이었다. 흥사단 역시 이런 재앙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인명의 손실, 귀중한 사료의 소실과 분실, 건물의 부분적인 파괴 등 참으로 가슴 아픈 손실을 입었다. <흥사단 운동 70년사>에 기록된 것만 하더라도, 조영후를 비롯한 5명의 단우가 피살되고, 백인제·이광수·김동원·김여식 등을 비롯한 24명의 단우가 납북되었고, 도산 선생 언행록 원고와 창단 때부터의 <단보> 등 많은 사료들이 압수당하거나 소실되었다.

    1951년 11월 25일 부산시 중구 부평동에 흥사단 임시 연락 사무소를 설치하고, 이사회와 월례회를 계속하고, 단보를 속간했다. 이런 전쟁의 와중에서도 이승만 정권은 발췌개헌안을 통과 시키고 정가(政街)는 더욱 어수선하고 사회는 혼란했다. 아울러 흥사단에 대한 자유당 정권의 모략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런 가운데서 흥사단은 도산전기를 다시 발행하여 보급하고, 53년 2월 2일에는 본부 연락 사무소를 대청동 성광치과 2층으로 옮기고, 5월 13일 부산 시공관에서 단우 및 내빈 250여 명이 창단 40주년 기념 대회를 개최했다.
    한편 송종익 하희옥 등을 중심으로 하는 미주 위원부의 단우들은 조국의 참상을 전해 듣고, 수차에 걸쳐 구제품과 구제금을 모금하여 보내왔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고, 9월에 서울로 복귀한 본부는 서둘러 전쟁의 상처를 복구하고,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정부로부터 <단보>의 발행 금지 처분을 받고, 편지적 성격을 띤 부정기적 소식지의 형식을 갖춘 <공함>으로 바꾸어 발행하고, 대회와 각종 수련 활동과 대외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흥사단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맞서서, 강좌와 언론 혹은 청년 운동을 통하여 당시로서는 정치단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한 비판적 세력으로 존재해왔다. 금요강좌를 통한 국민 계몽과 비판적 기능과 <새벽>을 통한 언론 활동은 직접 간접으로 민주화 과정에 기여했으며, 특히 4·19 직전에 발행된 <새벽> 3월호, 4월호, 5월호의 내용을 보면 가히 ‘지상 데모’라고 일컬을 만하다.

    아카데미의 창설

    1950년대 후반부터 흥사단이 늙어가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와 함께 청소년 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1956년 연차대회의 대회사에서 주요한 선생은 새 세대의 청년에게 바톤을 넘겨줄 시기가 되었음을 선언했다. 1956년에는 청년부(이미 1948년에 조직)가 분화되어, 고등학생회를 별도로 창립하고, 청년부의 활성화를 위한 방안이 모색되었다. 4·19혁명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은 흥사단은 대대적인 홍보활동과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1963년 9월 1일에 제정된 ‘세포의 조직과 운영요강’에 따라, 각 지역 분회 조직과 청년 아카데미, 대학생 아카데미, 고등학생 아카데미, 중학생 아카데미, 소년 아카데미를 창립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63년 8월 25일에는 본부 강당에서 청년 아카데미가 창립 총회를 개최하고, 이어 8월 31일에는 대학생 서울 아카데미가, 9월 13일에는 고등학생 서울 아카데미가 창립을 보았다. 이어서 1963년 10월 5일 부산 분회가 창립되고, 10월 6일에는 서울 분회가 창립되고, 뒤를 이어서 인천(64. 1), 대구(64. 9), 광주(65. 9), 대전(66. 3), 청주(66. 6), 원주(66. 5) 전주(67. 11), 진주(67. 11), 여수(68. 9), 제주(68. 10) 등지에서 아카데미와 분회가 창립되었다. 지역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의 경우 분회 보다 오히려 아카데미가 먼저 창립되었으며, 그 후 오랫동안 지방 조직에서 실질적으로 조직체의 생명은 아카데미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다.

    세분화된 조직의 활성화로 아카데미의 전성기를 구가하다!

    이처럼 세포 조직의 확대와 아카데미 조직의 활성화에 따라 흥사단은 새로운 활기를 얻게 되었고, 다양한 수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해 나갔다. 1964년 10월 5일 제 3차 약법을 개정하여 체제를 새롭게 정비하고, 동맹독서· 동맹체조· 동맹작업 등 단우의 수련 프로그램을 강화하고(1965년 9년 19일 예비단우 동맹수련 요강 제정), 1964년 4월 15일에는 <동광>, <단보>, <공함>, <새벽>의 맥을 이어서 새로운 기관지 <기러기>창간호를 발행하고,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수백 회에 걸친 전국적인 순회강연을 통하여 도산사상과 흥사단주의를 전파하였다. 이 순회 강연에는 주요한ㆍ장리욱ㆍ안병욱ㆍ신상초 등의 단우를 포함하여 저명한 단내외 인사들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의 열정적 활동은 도산의 사상과 흥사단 운동을 청년 학생들의 가슴에 아로새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 아카데미는 그 수와 양에 있어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대학생 서울아카데미의 경우,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대성빌딩 4층의 집회실이 좁아서 고민을 할 정도가 되었다. 그 대안으로 본부에서 학교별 분활 방침을 확정하여, 68년부터 ‘대학생 서울 아카데미’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등의 순으로 분할되기 시작했다. 물론 1964년에 이미 성균관대 도산연구회가, 1966년에 건국대 개척자회가 창립되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으며, 고등학교도 1967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선두로 학교별 아카데미가 창립되기 시작하여 양적으로 놀라운 발전을 보였다.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는 학생아카데미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대학생 아카데미는 전반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지향하는 대학 동아리로 변화하였다. 유신 이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학생운동 중심의 아카데미 운동은 저항적, 투쟁적 성격이 점점 강화되어가면서 80년대 중반에는 서울, 부산, 광주, 대전, 청주 등의 대학 아카데미는 완전히 학생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대체로 대학생의 의식화 커리큘럼을 통해 세계관의 변화를 모색하는 철학과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학습, 한국 근대사 학습을 통한 민족운동에 대한 이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는 정치경제학 및 사회철학 학습을 통해 실천적 지식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런 학습과정을 거친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의 대학생 아카데미는 비록 지역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었으나 대체로 민주화 운동의 주력으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단 지도부로서는 심각한 지도력의 한계를 느끼는 한편, 이념 상의 이질화 문제와 아울러 관리와 통제에도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 아카데미 운동은 한국 학생운동사에 기록될만한 양적·질적 성과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흥사단 내적으로는 조직을 확산하고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단우 양성에 기여했다. 현재 흥사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들이 거의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또한 입단은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아카데미 출신들이 흥사단 정신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시민운동의 중추적 단체로서의 흥사단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말까지 약 10여 년간 흥사단운동은 전과 다른 두 가지의 새로운 특징적 전환을 보인다. 하나는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운동의 외연을 넓히면서 대중적인 조직 확대를 꾀하는 노력을 보인 점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더불어 흥사단 통일운동을 대사회적, 시민운동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한 일이다.

    1991년 흥사단은 경실련, 자유지성300인회, 한국노총, 여성유권자연맹, 공명선거실천기독교대책위원회와 공명선거실천불교추진위원회 등 7개 단체와 공동으로 공명선거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이후에 공선협은 1992년 총선에서 57개 시민단체로 구성되고, 전국 39개 지역 400여개 단체가 참여하는 범시민단체 연대기구로 발전하여 2007년 5.31 지방선거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흥사단은 공선협 운동 기간 내내 사무처 운영 등을 통해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외에도 흥사단은 직능단체나 협회 이외에 시민운동단체로서 1990년대에 시민협(시민단체협의회), 교육연대(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등 여러 연대 모임의 중추 단체로서 활약하였다.

    흥사단은 1989년에 부설기관으로 도산아카데미연구원을 발족하여 사회발전을 위한 정책연구를 담당하고 사회 지도층의 재교육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직․간접적으로 흥사단 운동에 참여하는 전문가 및 사회지도층의 폭을 넓혔다. 또한 시민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93년 시민실천위원회를 발족하여 이 위원회를 창구로 하여 교육과 환경 등 여러 분야의 시민운동 연대기구에 적극 참여하면서 운동의 외연을 시민운동의 여러 영역으로 넓혀 나갔다. 한편, 흥사단 내부적으로는 1990년대를 통해 조직 확대와 단우 제도 개편을 위해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91년과 1996년에 두 차례에 걸쳐 흥사단 발전 5개년 계획(제1차 1991~1995, 제2차 1996~2000)을 수립·시행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단 운동의 근간 조직인 지부를 정비·확대하고, 단우 배가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쳤으며, 1995년에는 미국 워싱턴 D.C.에도 지부를 조직하여 미주 조직 발전과 확산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다양한 대중적 사업과 활동을 전개하다.

    청소년 운동 분야에서도 주요한 변화가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일부 지부에서 청소년 민속캠프 등 일반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지부의 청소년상담실 개설(1987)과 청소년 대학로 축제(1991) 실시, 본부의 제1회 통일꾼 수련대회(1991) 및 제1회 통일백일장(1992) 개최, 본부와 지부가 공동으로 추진한 ‘나라사랑 대행진’과 여러 지부의 다양한 ‘역사탐방’, ‘119 캠프’ 등 다채로운 캠프 및 체험교육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한편, 청소년연구원 설립(1992), 강서청소년 회관 수탁운영(1993), 1995년부터 본부 및 지부에 청소년자원봉사센터 설립(1996 광주광역시 청소년자원봉사센터 수탁, 1997 경상남도 청소년자원봉사센터 수탁), 도산청소년재단 설립(1996), 청소년 활동을 지원하는 문화사업단 설립(1997) 등 다양한 기관 설립과 여러 개의 수탁시설 운영이 이어졌다. 이와 같은 청소년 프로그램의 실시와 기관 설립 및 사업 전개는 흥사단 청소년 운동이 아카데미 운동 중심으로부터 일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대중적인 사업과 활동을 전개하는 쪽으로 확대, 전환되어갔음을 뜻한다.

    1990년대 시민운동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흥사단은 활동과 사업의 외연을 일반대중에게로 넓히면서 공명선거, 사회, 교육, 환경, 교통 등 다양한 분야의 시민운동에 참여하였다. 흥사단은 21세기의 사회변화를 맞이하여 다양한 시민운동에 관여하면서 운동 역량의 한계와 운동의 효율성 문제를 고민하고 흥사단 운동의 진로를 진지하게 모색하였다. 흥사단은 내적으로 임원들의 고민과 자료수집 및 연구,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쳐 공론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 논의의 분기점이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에 이루어졌다. 2000년 4월 15일과 16일 양일간 창립 87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임원들이 모여 흥사단이 시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중점적으로 전개해 나갈 3대 운동 과제를 설정하고, 그 운동에 주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같은 해 5월 광주에서 개최된 제 87차 대회에서 3대 운동 과제를 공표하였다. 이후, 2003년 흥사단 창립 90주년을 기해 공표된 <흥사단 비전 2013>에서 흥사단 3대 시민운동의 개념이 더욱 분명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흥사단 비전 2013>은 창립 90주년을 기해, 10년 후 100주년을 맞이하는 자세와 성찰을 담아 ‘이념의 현대화’와 ‘사이버 흥사단 운동’ 등 10대 과제를 정하여 흥사단 운동을 적극 추진하고자 하였다.

    흥사단은 한국사에서 유례가 없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비종교, 비영리, 시민사회단체이다.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굴곡, 영욕과 함께 한 흥사단 운동 100년의 역사를 어떻게 성찰하고, 평가하여, 앞으로 어떤 비전을 세워 나갈 것인가가 오늘의 과제다. 그 동안 흥사단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 근대화와 시민의식의 함양과 사회교육,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왔다. 민족적 사명을 가진 인물 기르기를 통해 우리가 바라는 사회변혁과 이상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이제 21세기의 다문화 사회, 세계화의 변화 물결 속에서 ‘갈등’과 ‘민족’을 넘어 새로운 통합과 다문화 주민의 글로벌 가치 창조를 통한 한민족과 인류의 행복 증진을 위해 더욱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 사진 내용 출처 흥사단(yka.or.kr)